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마 공화국 (문단 편집) === [[로마 내전]] === 그 뒤 현재 [[튀르키예]] 지역에 있는 [[폰토스 왕국]]의 왕 [[미트리다테스 6세]]가 로마의 비티니아 속주를 침공하는 일이 발생했다('''미트리다테스 전쟁'''). 이에 현직 집정관이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군단을 편성했으나 마리우스는 자신의 옛 부하들을 움직여 군단 지휘권을 현직 집정관이 아닌 마리우스가 갖는 법안을 민회에서 통과시켰다. 이에 분노한 술라는 놀라에서 편성한 군단을 이끌고 수도 로마를 점령하고 마리우스 파를 제거한 뒤 미트리다테스 6세와 싸우러 떠난다. 하지만 술라가 떠나자 군사력이 없던 로마를 마리우스가 점령하였고 마리우스는 원로원 의원들과 그들의 지지자를 모두 학살했다. 그러나 마리우스가 겨우 보름 만에 사망하면서 마리우스파는 구심점을 잃게 된다. 그 뒤 로마는 술라와 마리우스파의 [[내전]]에 휩싸였다. 미트리다테스 6세와 강화를 맺고 돌아온 술라는 마리우스파의 저항을 진압하고 로마를 점령한 뒤 이들을 대거 숙청했다.[[https://areyoukorean1.tistory.com/19|#]] 그 뒤 로마 원로원 귀족들의 [[독재]]는 계속되었으나 술라의 부하였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술라의 개혁[* 본인은 공화정을 지키려고 생각했으나 그 수단으로 공화국의 전통을 부정하는 요소를 그대로 사용한 역설적인 내용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로마 시민과 민회의 권한을 축소시킨 것. 애시당초 공화정은 민회에서 하는 시민의 투표가 핵심인데 시민의 권한을 줄이는 것은 쓸모도 없고 공화국 정신도 부정하는 것이다.]을 무효화하고 더불어 민회에서 제정된 법은 원로원의 동의가 없더라도 효력을 갖는 것을 골자로 하는 호르텐시우스 법을 부활시켰으며[* 말할 것도 없이 이 법을 폐지한 사람 또한 술라였다.] 또한 이들은 호민관과 연합하여[* 로마의 호민관은 둘에게 유리한 법안을 통과시키는 대신 막강한 군사력의 보호를 받았다. 말할 것도 없이 호민관들은 신체 불가침권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원로원 최종 권고에 무력화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폼페이우스나 크라수스같은 세력가들에게 기대서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밖에 없었던 것.] 원로원과 대놓고 대립하는 등[* 실제 이유는 원로원이 자신들의 권력 행사에 제약을 거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사실 이들은 로마에서도 신참에 해당하는 쪽이라 명문 귀족 가문과는 잘 맞지 않았다. 크라수스같은 경우는 주로 기사 계급을 대표했고 폼페이우스는 군부를 대표했기 때문.] 이 무렵에 이르면 원로원 귀족들의 정당성은 상당 부분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저항감을 가지고 있었던 민중파(구 마리우스파)의 일부 역시 로마에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인데, 그는 젊은 시절에는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또한 딱히 원로원에 반대하는 정책을 입안한 적도 없었으므로 원로원 의원들이 그를 경계했지만 딱히 적대하지는 않았다.[* 물론 실제로는 뼛속까지 민중파였던 인물로 대놓고 술라에게 개겼던 전력이 있던 인물이 바로 카이사르였다. 그렇다보니 원로원에 직접 대놓고 반대하진 않았지만(일단 카이사르 본인도 원로원 의원이다.) 원로원 최종권고에 해당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끝까지 반대하였다. 물론 카토같은 골수 원로원파는 카이사르에게 적대하였고.] 카이사르는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부임한 [[히스파니아]] 서부 지역 [[총독]]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 당시 동방 원정을 끝내고 [[가이우스 마리우스|마리우스]] 때와 마찬가지로 퇴직금으로 농지를 배분해야 하는 문제로 골치를 썩이고 있었던 폼페이우스와 비밀리에 동맹을 맺었다. 여기에 막대한 재력을 가진 크라수스까지 끌어들여 [[삼두정치]]로 결속을 맺은 뒤 폼페이우스의 지원으로 집정관에 당선되어 농지법을 통과시켰다.[* 다만 아무리 그래도 그라쿠스 형제의 안은 너무 급진적이라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잃을 수도 있어서 주로 폼페이우스의 퇴직병들에게 토지를 나눠주는 식으로 해결했다. 그리고 이후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가 퇴직병에게 일정한 액수의 퇴직금을 주는 법령을 제정함으로써 이 논란은 종지부를 맺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